변화와 안정의 모순 — 안정 위에서만 변화가 작동한다

변화와 안정의 모순은 새로운 영역으로 도약하려는 요구와 기존 자산을 지켜 수익을 내려는 요구가 같은 자원을 두고 동시에 작동하면서 생기는 긴장이다. 두 요구는 서로 다른 조건을 필요로 한다. 변화는 분산된 구조와 실패를 허용하는 평가를 요구하고, 안정은 집중된 구조와 효율 중심의 평가를 요구한다. 그래서 한 조직이 둘을 모두 잘하기는 어렵다. 모순경영의 관점에서 이 모순의 핵심은 어느 쪽을 고를 것인가가 아니라, 두 요구가 서로 다른 잣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는가다. 같은 평가표 안에서 경쟁시키면 변화는 언제나 진다.

변화와 안정의 모순 개념도 — IBM 30년의 시기별 무게중심 이동

안정은 변화의 반대가 아니라 변화의 기반이다

제임스 마치(James G. March)는 1991년 조직의 학습 활동을 탐색(exploration)과 활용(exploitation)으로 나눴다. 탐색은 실험과 위험 감수이고 결과가 불확실하며 보상이 멀다. 활용은 검증된 자산의 정교화이고 결과가 비교적 확실하며 보상이 가깝다. 두 활동은 같은 자원을 두고 경쟁한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함정이 기다린다. 활용에 치우치면 성공의 함정에 빠진다. 단기 효율은 높아지지만 환경이 바뀔 때 무너진다. 탐색에 치우치면 실패의 함정에 빠진다. 끊임없이 시도하지만 어느 것도 충분히 키우지 못한다.

그렇다고 균형이 5 대 5를 뜻하지는 않는다. 적정 비율은 조직이 속한 환경에 따라 달라지며, 모든 조직에서 변화의 비중이 높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실무에서 더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다. 변화는 안정 위에서만 설계될 수 있다. IBM의 메인프레임, 삼성전자의 제조 기반이 그랬듯, 기존 시스템이 수익을 내며 버티고 있어야 새로운 시도의 실패를 흡수할 수 있다. 변화를 추진한다며 안정의 영역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갈등만 만든다.

IBM — 분리와 통합을 동시에 설계하다

1990년대 초 IBM은 대규모 손실 속에 있었다. 당시 외부 분석가들의 지배적 권고는 사업부별 분사였다. 루 거스너는 이를 거부했다. 고객이 원하는 것이 통합된 솔루션이라면 분사는 시장 신호와 반대 방향이라는 판단이었다. 그가 읽어낸 것은 손실이라는 표면 신호 아래에서 메인프레임 고객의 안정과 새로운 컴퓨팅 시대의 변화가 동시에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번째 감지는 더 중요하다. 효율과 수익성은 회복됐는데 신사업이 좀처럼 자라지 않았다. 보통은 “신사업 추진력 부족”으로 진단하고 조직을 강화한다. IBM은 대신 신사업 실패의 원인을 분석했고, 그 원인이 기존 사업의 성공 이유와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감지 위에서 만들어진 EBO(Emerging Business Opportunity)는 네 가지 메커니즘으로 정리된다.

  • 평가 기준의 이중화 — Horizon 1·2·3 사업을 각각 다른 잣대로 측정했다. 성숙 사업은 수익과 마진으로, 성장 사업은 점유율과 성장률로, 미래 사업은 마일스톤으로 평가한다. 같은 표를 쓰지 않으므로 신사업이 기존 사업과 경쟁하지 않는다.
  • 분리와 통합의 동시 설계 — EBO는 기존 사업부에서 독립했지만 CEO 직속으로 보고했다. 분리만 했다면 고립된 실험실이 됐을 것이고, 통합만 했다면 관료주의에 흡수됐을 것이다.
  • 시간성의 재배치 — 신사업 회의에서 올해 매출을 묻지 않고, 기존 사업 회의에서 10년 뒤를 묻지 않게 한 것이다. 시간 지평이 다르면 적합한 의사결정도 다르다.
  • 인재 흐름의 양방향 설계 — EBO 경험을 임원 승진의 평가 요소로 만들었다. 양손잡이는 조직도의 모양이 아니라 사람이 두 세계를 오갈 수 있을 때 작동한다.

삼성전자 — 모순을 드러내는 구조를 만들다

같은 모순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한국 사례가 있다. 1993년 이건희 회장이 미국 매장에서 본 것은 먼지를 쓴 채 구석에 밀려난 삼성 제품이었다. 그러나 신호 자체는 새롭지 않았다. 판매 데이터와 시장 보고서는 그 전부터 있었다. 바뀐 것은 해석이었다. 후발 주자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던 관점이 극복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여기서도 감지의 본질은 신호의 양이 아니라 해석이다.

설계의 핵심은 디자인 부서의 위치였다. 당시 대부분 기업에서 디자인은 연구개발 아래의 한 팀이었고, 그 구조에서는 상품화 가능성과 가성비가 먼저 작동한 뒤에야 디자인이 개입한다. 충돌이 일어나기 전에 위계가 정리돼 버리므로 모순이 표면화되지 않는다. 삼성전자는 1996년을 디자인 혁명의 해로 선포하고 디자인 철학을 제정했으며, 2001년 디자인경영센터를 CEO 직속 독립 조직으로 재편했다. CEO 직속이라는 위치는 상징이 아니라 협상력의 문제다.

이 선택의 의미는 분명하다. 디자인(변화의 축)과 생산(안정의 축)이 대등해지면 둘은 충돌한다. 그 갈등은 비용이 아니라 신호다. 두 축이 각자의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2006년 보르도 TV는 그 충돌의 산물이다. “TV는 꺼져 있는 시간이 더 길다, 따라서 가구다”라는 재정의를 실현하려고 스피커를 화면 옆에서 아래로 옮겼는데, 음질을 중시하는 개발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유럽 시장 실험이라는 우회로를 거쳐 합의가 만들어졌다.

균형은 지금도 움직인다. 원가우위의 논리는 사라지지 않고 생산·물류 부서에 그대로 살아 있으며, 경영진의 일은 그 긴장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조정하는 것이다. 2025년 외국인 디자인 총괄 사장 영입은 균형추를 다시 변화 쪽으로 옮기는 조치로 읽을 수 있다.

코닥 — 신호를 봤으나 모순으로 보지 않았다

세계 최초의 디지털 카메라를 만든 회사는 코닥이었다. 1975년의 일이다. 경영진의 반응은 “좋다, 다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였다. 코닥의 수익원은 카메라가 아니라 필름과 인화지였고, 디지털이 성공할수록 그 수익원은 사라진다.

1990년대 후반 코닥도 디지털 사업에 진출했다. 디지털 부서는 신설됐지만 자원 배분도 의사결정 권한도 필름 부서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평가 기준은 하나였고, 마진이 높은 필름 옆에서 초기 단계의 디지털은 언제나 “수익성이 떨어지는 사업”으로 분류됐다. 신사업을 평가하는 잣대 자체가 신사업을 죽이고 있었다. 2003년에야 디지털 전환을 공식 선언했으나 이미 늦었고, 2012년 1월 파산 보호를 신청했다.

코닥은 정보가 없어서 실패한 것이 아니다. 그 정보를 “안정과 변화가 동시에 작동해야 할 모순”으로 인식하지 않고 “필름이냐 디지털이냐”의 선택으로 봤다. 선택의 관점에서 디지털은 필름의 적이었고, 적은 누르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표면적으로는 IBM의 EBO와 비슷한 조직 단위가 코닥에도 있었다는 점이 이 대비의 핵심이다. 부서를 만드는 것과 그 부서가 다른 잣대로 평가받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세 단계로 정리하면

단계IBM코닥
감지위기를 모순으로 재해석 — 안정과 변화가 동시에 요구된다고 인식신호를 인식했으나 자기잠식 우려로 의도적으로 눌렀음
설계분리(독립 조직)와 통합(CEO 직속)의 동시 설계, 평가 기준 이중화디지털 부서를 신설했으나 필름 부서의 영향력 아래에 둠, 평가 기준은 단일
균형시기별 비중을 동적으로 재조정안정 쪽으로 고정, 변화는 항상 부차적
7요소 정합일곱 요소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재정렬전략 선언만 바뀌고 평가·문화·사람은 그대로

이 모순을 다룬 기업들

  • IBM — 평가 기준을 나누고, 조직은 분리하되 보고라인은 통합했다.
  • 삼성전자 — 모순을 없애지 않고 조직의 위계를 바꾸어 표면화했다.
  • 코닥 — 신호를 가장 먼저 알고도 그것을 모순이 아니라 선택으로 읽었다. 선택 함정.

변화의 실험에 자율을 얼마나 줄 것인가는 곧 자율과 통제의 문제이고, 신사업과 기존 사업이 자원을 두고 부딪히는 국면은 경쟁과 협업의 문제로 이어진다. 사회적 성과와 재무적 성과의 모순은 여기에 시간 지평이라는 축을 하나 더한다. 네 유형의 공통 원리는 모순경영이란 무엇인가에서 다룬다.

우리 조직은 어떤가 — 자가 진단 질문

  • 신사업과 기존 사업이 같은 평가표로 측정되고 있는가. 같다면 신사업이 지는 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 우리가 만든 신사업 조직은 분리돼 있는가, 통합돼 있는가. 둘 다 아니라면(어중간하게 기존 부서 밑에 있다면) 코닥의 디지털 부서와 같은 위치일 수 있다.
  • 변화를 담당하는 부서가 기존 부서와 대등하게 협상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가. 보고 라인이 어디로 연결되는지가 그 답이다.
  • 최근 부서 간 갈등이 늘었다면, 그것은 관리 실패인가 아니면 두 축이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인가.
  • 한때 변화의 축이었던 것이 지금은 안정의 영역으로 옮겨가 당연시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새로운 축이 들어설 자리를 준비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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