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두 글에서 K-pop 그룹이 팀 정체성과 개인 개성을 함께 유지하는 구조를 살펴봤고, 그 바탕에 집단 안에서 개인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기 인식이 있다는 설명을 검토했다.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이 구조는 아이돌 산업의 특수한 조건이 만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대에서도 관찰되는가. 이 글은 기업 사례에서 같은 구조를 찾아보고, 그 구조가 어떤 조건에서 자원이 되고 어떤 조건에서 소모가 되는지를 정리한다.
이 글의 성격과 한계
기업의 성패에는 산업 구조, 정책, 자본 조달, 환율, 시장 진입 시점처럼 문화와 무관한 변수가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다루는 문화적 설명은 그런 변수를 대체하지 않으며, 여러 요인 가운데 하나로 읽어야 한다. 소수 사례에서 문화적 일반화를 끌어내는 서술 방식 자체에 한계가 있다는 점도 밝혀 둔다.
기업에서 관찰되는 같은 패턴
현대의 조선소. 1970년대 초 현대는 조선소 건설 자금을 구하기 위해 영국의 금융기관을 찾았다. 배를 만들어 본 적이 없는 나라의 계획이었다. 정주영 회장이 500원권 지폐의 거북선을 꺼내 보이며 한국은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일화는 세부가 논쟁적이다. 방문 시점과 해당 지폐 도안의 발행 시점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오래 제기되어 왔다. 일화의 사실 여부와 별개로 읽을 것이 있다면, 조직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면서 그 방식에서 개인의 판단이 강하게 작동했다는 점이다.
삼성의 반도체. 1983년 2월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실패하면 그룹 자산의 상당 부분이 사라지는 결정이었고, 외부의 평가는 냉소적이었다. 그해 11월 삼성은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 이후 1992년에는 64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여기서도 같은 구조가 보인다. 조직의 집단적 실행력과 개인의 결단이 함께 작동했다. 집단이 개인을 누른 것도, 개인이 집단을 이탈한 것도 아니다.
두 사례 모두 리더 개인의 이야기로 읽히기 쉽다. 그러나 결단만으로는 6개월도, 9년도 걸리는 일이 완성되지 않는다. 결단을 실행으로 옮긴 것은 집단이었고, 그 집단 안에서 개인의 판단이 계속 작동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었다는 점이 관찰의 핵심이다.
일본 경영과의 비교, 그리고 그 비교의 한계
일본식 경영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카이젠이 자주 언급된다. 주어진 틀 안에서 완성도를 계속 높이는 방식이고, 1980년대까지 이 방식은 세계적으로 강력했다.
1990년대 이후 요구가 달라졌다는 서술도 널리 통용된다. 원가 절감보다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일이 중요해졌고, 틀 안의 개선이 아니라 틀 자체를 바꾸는 혁신이 요구됐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대상성 자기 개념이 강한 문화는 불리하다는 설명이 따라붙는다. 틀을 바꾸겠다고 나서는 개인이 나오기 어렵다는 논리다.
이 설명은 그럴듯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1990년대 이후 일본 기업의 상대적 부진에는 자산 버블의 붕괴, 금융 시스템의 문제, 인구 구조의 변화, 환율 환경처럼 문화로 설명되지 않는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문화적 요인을 단일 원인으로 제시하는 서술은 정확하지 않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더 좁다. 틀을 바꾸는 시도가 개인에게서 나와야 하는 국면에서, 개인이 집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는 그 시도가 나오기 쉬운 조건을 갖는다. 조건이 유리하다는 것이지 결과가 보장된다는 뜻이 아니다.
같은 구조가 소모전이 될 때
여기까지가 잘 작동한 경우다. 같은 구조는 반대로도 간다.
집단 안의 주체성은 유대와 주체성이 함께 있을 때 작동한다. 둘 중 하나가 빠지면 다른 결과가 나온다.
주체성이 빠지면 침묵이 된다. 집단에 속해 있지만 판단을 드러내지 않는 상태다. 상급자의 의도를 읽고 그에 맞추는 것도 주체적 판단이지만, 그 판단이 조직의 목적이 아니라 개인의 안전을 향할 때 조직은 현장의 신호를 잃는다.
유대가 빠지면 내부 경쟁이 된다. 동료가 협력의 상대가 아니라 순위 경쟁의 상대가 되면, 성취 욕구는 조직 밖이 아니라 조직 안을 향한다. 성취 동기가 강한 문화일수록 이 소모전의 강도는 오히려 커진다.
한국 조직에서 이 둘은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공식 석상의 침묵과 물밑의 치열한 경쟁이 한 회사 안에 있다. 이것은 구조가 없어서가 아니라, 있던 두 축이 분리된 결과다.
무엇을 설계할 것인가
그렇다면 조건은 무엇인가. 네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개인 성과와 팀 성과를 두 개의 축으로 다룬다. 하나의 축으로 다루면 어느 한쪽을 올릴 때 다른 쪽이 내려간다. K-pop 사례에서 확인한 것은 두 축이 독립적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평가와 보상에서 두 축을 함께 인정하지 않으면, 조직 안에서 한쪽은 사라진다.
둘째, 목적으로 울타리를 만든다. 행동을 하나하나 지정하는 대신 방향을 공유하고 그 안에서 판단하게 한다. 그룹의 색이 분명한 팀에서 개인의 개성이 더 뚜렷해지는 것과 같은 구조다. 울타리가 없으면 자율은 방임이 되고, 울타리가 너무 촘촘하면 주체성은 눈치가 된다.
셋째, 권한과 책임을 함께 준다. 권한만 주면 결과가 흩어지고 책임만 지우면 주체성이 위축된다. 책임의 범위가 넓어지면 관심의 범위도 함께 넓어진다.
넷째, 반대 의견이 살아남는 경로를 만든다. 침묵의 동조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경로의 문제다. 다른 의견을 말한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조직은 기억한다. 그 기억이 다음 사람의 선택을 결정한다.
모순은 그 자체로 능력이 아니다
한국인이 모순적이라는 말은 오래 쓰였다. 빨리 하면서 오래 견디고, 집단을 말하면서 개인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결함으로 볼 수도 있고 자원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사이트의 입장은 어느 쪽도 아니다. 상반된 것을 함께 품는 성향 자체는 능력이 아니다. 조건이 갖춰졌을 때 능력으로 전환되고, 조건이 없으면 갈등과 피로로 나타난다.
K-pop이 보여준 것은 두 축이 함께 높을 수 있다는 사실이지, 한국 조직이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아이돌 그룹에서 그 구조가 작동한 것도 문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랜 공동 훈련, 명확한 팀 정체성, 개인 활동을 허용하는 제도가 함께 있었다. 모두 설계의 결과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돌아온다. 우리 조직에는 그 조건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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