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의 네 가지 특성은 조건이 맞을 때 모순을 다루는 자원이 된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같은 특성이 조급증, 침묵, 배타성, 위장으로 나타난다. 빛과 그림자는 다른 뿌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같은 성향이 균형을 잃었을 때의 다른 얼굴이다. 이 글은 네 특성 각각의 그림자를 짚고, 무엇이 두 얼굴을 가르는지를 정리한다.
첫 번째 그림자 — 조급증
빨리빨리와 은근과 끈기의 균형이 무너지면 속도만 남는다.
속도가 목적이 되는 순간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다. 빠르게 도달했는데 도달한 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상황이 반복된다. 목적이 없으면 실패는 자산으로 남지 않는다.
반대 방향의 그림자도 있다. 끈기가 방향이 틀린 곳에서 작동하면 비용만 증가한다. 실패를 정리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조직에서, 은근과 끈기는 손실을 키우는 미덕이 된다.
두 번째 그림자 — 침묵의 동조, 그리고 소모적 경쟁
집단 안의 강한 주체성은 두 방향으로 무너진다.
주체성을 잃은 집단성은 침묵의 동조가 된다. 이것이 위험한 이유는 감지 기능의 마비의 징조이기 때문이다. 모순 경영의 첫 단계인 감지는 현장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살아 있어야 작동한다. 침묵의 동조는 그 흐름을 끊는다. 조직은 신호가 없어서가 아니라 신호를 말하는 사람이 없어서 모순을 감지하지 못한다.
유대를 잃은 주체성은 소모적 내부 경쟁이 된다. 동료가 잠재적 경쟁자로만 보이는 조직에서 성취 욕구는 제로섬 게임이 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스택 랭킹이 만들어 냈던 부서 간 소모전이 한국 조직에서 재현될 때, 그 강도는 성취 동기가 강한 문화일수록 오히려 커질 수 있다.
공식 석상의 침묵과 물밑의 치열한 경쟁이 함께 있는 조직. 많은 한국 직장인에게 낯설지 않을 이 풍경은 집단성과 주체성이 균형을 찾지 못하고 분리되어 버린 상태다.
세 번째 그림자 — 배타성, 그리고 자율과 통제의 교착
개방성과 폐쇄성의 공존이 무너지면 두 층위에서 문제가 나타난다.
조직과 외부의 관계에서, 개방을 잃은 폐쇄는 배타성이 된다. 우리와 남을 가르는 경계는 위기에 응집력을 만들지만, 경계가 고착되면 외부의 인재와 지식을 밀어낸다. 한국이 창의성 지수에서 기술은 최상위인 반면 관용은 하위에 머무는 것이 이 지점을 보여 준다. 기술과 지식의 융합에는 능한 사회가 사람의 융합에는 아직 서툴다.
조직 내부의 운영에서, 이 특성의 붕괴는 자율과 통제의 교착으로 이어진다. 권한을 주었다고 말하지만 결정은 위에서 내리면 형식적 자율이 되고, 주도성은 원하되 결과의 책임은 피하려는 태도는 자율이 아니라 고립된 개인의 자유에 가깝다.
둘 다 모순을 피하는 방식이며, 서로가 서로의 변명이 된다. 경영진은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니 권한을 줄 수 없다고 말하고, 구성원은 권한을 주지 않으니 책임질 수 없다고 말한다. 두 진술은 모두 사실이고, 그래서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네 번째 그림자 — 위장, 그리고 절충
다양성을 융합하는 능력의 그림자는 융합이 실패한 자리가 아니라 융합인 척하거나 어중간하게 멈춘 자리에서 나타난다.
위장. 대외적으로는 사회적 가치를 내세우고 내부적으로는 재무 논리만으로 움직이는 조직은 두 가치를 융합하는 것이 아니라 위장하는 것이다. 좋은 의도로 나쁜 의도를 씻어 낸다는 뜻에서 워싱이라 불린다. 융합의 언어를 능숙하게 쓸수록 외부에서의 검증은 어려워진다.
절충. 두 요구를 절반씩 반영해 변화도 안정도 아닌 개편, 자율도 통제도 아닌 제도를 만드는 방식이다. 겉모습이 융합과 비슷해서 더 위험하다. 갈등을 정면으로 다루기보다 모두가 조금씩 양보한 모양새를 만드는 관행은 갈등 비용을 줄이는 것 같지만, 두 극의 긴장이 만들어 낼 에너지를 포기하는 선택이다.
무엇이 빛과 그림자를 가르는가
네 그림자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다. 어느 경우에도 문제는 특성 자체가 아니라 특성의 균형 상실이다.
그렇다면 질문이 바뀌어야 한다. 한국성은 좋은가 나쁜가가 아니라, 무엇이 균형을 지키고 무엇이 무너뜨리는가다.
답은 설계다. 그리고 그 설계는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것이었다. 변화와 안정을 조직 구조의 차원에서 분리한 조직, 두 가치의 관계를 지배구조에 반영한 조직, 신뢰를 제도로 먼저 투자한 조직, 통합할 영역과 현지화할 영역을 나눈 조직. 균형을 유지한 사례들은 성향에 기대지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이 설계들은 한국성과 무관하게 모든 조직에 필요한 것들이다. 한국성이 있으니 설계가 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설계가 갖춰졌을 때 한국성이 비로소 작동한다.
리더는 조건이지 처방이 아니다
설계의 조건 가운데 큰 변수가 리더다. 위계의 힘이 강한 한국 조직에서 리더는 환경에 가깝다. 같은 구성원들이 리더에 따라 침묵하기도 하고 활발하게 논쟁하기도 한다.
그러나 리더를 조건의 전부로 보는 순간, 리더 개인에 대한 조직의 의존이 처방처럼 취급된다. 좋은 리더를 뽑으면 해결된다는 결론은 리더가 바뀌는 순간 무너진다.
리더는 큰 조건이지만, 좋은 설계는 리더가 바뀌어도 조건이 유지되도록 만든다. 그 차이가 일시적 균형과 지속되는 균형을 가른다.
결함이 아니라 상태다
마지막으로 짚어 둔다. 여기 열거한 그림자들은 한국인의 본질적 결함이 아니다.
조급증도 침묵도 배타성도 위장도, 조건이 바뀌면 변한다. 그리고 실제로 변해 왔다. 산업화 시기에 당연하게 여겨지던 관행 가운데 상당수는 지금 조직에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균형이 무너진 상태를 두고 민족성을 탓하거나, 일시적으로 균형이 맞은 상태를 두고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같은 오류의 양면이다. 둘 다 조건을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다. 실제로 물어야 할 것은 조직의 환경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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